정부출연연구원의 조직개발 로드맵

2020년 하반기 18번의 조직문화 특강

작년 하반기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을 대상으로 총 18번의 조직문화 특강을 진행했다. 특강 뒤에 이어지는 Q&A 세션은 언제나 흥미로웠다. 나는 리더의 고민과 조직의 현상을 들을 수 있었고, 리더는 여러 조직을 둘러본 나의 경험과 생각을 듣는 시간이었다. 대체적으로 리더들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고 내가 전하는 답도 유사했지만 문답에서 오가는 서로에 대한 앎이 늘 기대되었다. 지난 몇 년간 출연연을 만나 조직개발 컨설팅을 진행하며 출연연만의 독특한 조직문화를 가까이에서 관찰했다. 출연연의 조직문화는 출연연을 둘러싼 정책과 제도의 영향을 오랜 시간 받으며, 연구조직이자 공공기관의 특징이 결합되어 빚어졌다. 조직의 주요 사안을 다루다 보면 조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사람의 성격으로 비유하자면 가끔은 너무도 고약해서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그 어떤 조직보다 학구적이고 진지한 토론을 통해 합리성을 찾아가는 즐거움도 있다.

출연연과의 만남과 인연

출연연과의 인연은 아주 오래된 일이다. 유년 시절부터 연구단지에서 성장한 나로서 출연연과의 작업은 오래 알던 친척을 새삼 새롭게 알아가는 일이었다. 2017년, 새로운 리더십이 발휘되기 시작한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을 만나 E-BOARD라 불리는 CHANGE AGENT의 첫 시작과 함께 연구원 속 변화 관리자라는 낯선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논의를 거듭하며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지켜봤다. 2018년, 3월 400명이 1박 2일 동안 한자리에 모여 연구원의 존재 이유를 고민했다. 최고 경영자를 포함한 400명의 회의를 설계하고 이끄는 것은 내게도 매우 큰 도전이었다. 같은 해, 늦봄 무렵에는 어느덧 작성된 지 40년이 지난 정관을 돌이켜보며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시간을 위해 가치체계를 재정립하기로 했다. 연구원 출범 이래로 40년 동안, 연구원을 움직인 힘이었다. 그 사이 세상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시대의 변화를 읽고 연구원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고민하기로 한 것이다. TFT가 결성되고 열린 첫 회의는 예상과 다르지 않게 나홀로 고군분투하는 시간이었다. 다섯 시간 동안, 이 과업을 왜 해야 하는가 토론했지만 위원들은 스스로를 설득시키지 못했다. 회의를 마치고 담당자님께 아직 가치체계를 논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다고 솔직한 심정을 표했다. 그리고 담당자님은 삼주 뒤쯤, TFT를 재정비하여 다시 시작해보자고 연락하셨다. 그렇게 6월에 다시 만난 TFT와 3개월 동안, 매주 월요일을 함께 보냈다. 온갖 좌충우돌을 겪으며 여름이 절정을 향했을 무렵, TFT는 주어진 미션을 완료했다. TFT가 미션부터 행동 강령에 이르는 모든 내용을 치열하게 논의하고 모든 워딩을 직접 정했다. TFT가 마무리되던 날, 이 과업을 왜 내가 해야 하는지 도통 모르겠노라 했던 위원들은 해산 시간이 넘도록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후, TFT가 논의하고 결정한 모든 내용은 책자로 정리되었으며 스스로 정한 가치체계로 내재화 작업을 이어갔다. 현재 연구원은 E-BOARD 4기 활동을 마무리하고 있으며 그간 모든 기수를 지켜보면서 자발적 참여자가 압도적으로 늘어난 것을 기뻐할 따름이다.

아직 2018년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그해 상반기, 월요일과 금요일은 주로 출연연에서 하루를 보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과기부)가 출연연에게 더 큰 자율과 책임이라는 주제로 조직의 미래 방향성과 운영 전략을 고민하라는 숙제를 주었다. 출연연의 대표격인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이 당시 선제적으로 과기부의 요청을 수행하게 되었으며 이를 위해 구성된 TFT의 전략 회의를 3개월간 리딩하게 되었다. 비전부터 보상까지 조직의 지향점뿐만 아니라 이해관계가 첨예한 사안까지도 다루어야 했다. 매주 금요일 진행된 회의에서 치열한 논의가 이어졌다. 이때 내가 가장 많이 고민했던 것은 어떻게 서로의 생각에 귀 기울이게 할 것인가였다. 당시의 회의들이, TFT 리더들과 나눴던 대화가 지금도 생생하다. 봄을 온전히 쏟아부은 전략 회의의 결과가 연구원 내 공개되던 날엔, 더 많은 구성원들과 함께 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러나 같은 해 여러 본부를 만나 각 본부의 비전과 전략을 논하며 구성원들이 개인의 연구를 넘어 조직의 사안을 생각하고 고민하는 회의들이 이어졌다.

출연연 조직개발 3년 로드맵

그 뒤로 여러 출연연과 다양한 프로젝트를 이어오고 있다. 일반 기업과의 작업이 훨씬 많음에도 출연연이 문의하는 고민은 도전적인터라 늘 강한 기억을 남긴다. 그간 출연연과의 작업을 돌이켜 출연연이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시도해볼 만한 조직개발 로드맵을 소개하고자 한다.

STEP 1) 연결과 대화

먼저 가장 첫 번째 단계는 연결과 대화를 지향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때의 목표는 리더를 비롯해 구성원들이 개별 연구를 넘어 조직이라는 공동체로 관점을 확장하는 것으로 전체가 부분의 합보다 커지는 것의 중요성을 아는 것이다. 각자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공동의 목표와 하나의 전체가 되어 움직이는 합일이다. 많은 출연연이 개별 역량이 뛰어난 구성원들이 서로 협력하지 못하는 데에서 느끼는 한계가 크다. 따라서, 서로의 역량과 생각을 연결하는 참여적 대화가 시작되어야 한다. 그래야 접점이 생기고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사회적 자본을 창출할 여지가 생긴다.

구체적인 활동으로는 최고 경영자가 구성원들에게 조직 방향성을 공유하는 것, 최고 경영자를 포함한 경영진들이 연구를 넘어 경영에 대한 양질의 대화를 지속하고 결속력을 강화하는 것, 구성원간 조직의 사안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유와 대화의 방식으로 일방적인 전달이 아닌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스토리텔링과 OPEN Q&A를 통해 양쪽이 서로의 존재감을 느끼며 진솔하게 대화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특히, 코로나로 인해 사람 간의 연결이 더욱 약화된 상태에서는 비대면 커뮤니케이션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한 가지 더 제언한다면, 연구 출신의 최고 경영자가 조직을 운영하는 행정 파트와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래야 조직의 방향성과 기관 운영이 형식적 차원을 넘어 실질적으로 연동되어 작동된다.

이 단계는 조직개발을 시작하는 단계이다 보니, 만남을 중심으로 하는 이벤트 형태의 조직문화 활동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므로 일련의 만남들이 단순 이벤트가 아닌 만남을 통한 연결과 사회적 자본 구축에 있음을 강조하고 앞으로 이어질 소통 로드맵을 안내하여 구성원들로 하여금 소통과 대화의 의미를 발견하여 소모성 만남이 아님을 인지하도록 하는 것이 수반되어야 한다.

STEP 2) 선택과 집중

다음으로는 조직문화를 점진적으로 변화시키는 단계이다. 앞서 조직의 방향성과 사안에 대한 발산적 논의가 이루어졌다면 이제는 무엇에 집중할지를 결정하고 변화의 방법을 탐색해야 한다. 연구원이 추구하는 모습을 구체화하고 그 모습을 실현하기 위해 가장 집중해야 하는 사안들을 발굴하는 것이다.

방법으로는 연구원의 AS IS와 TO BE를 정리하고 실행을 위해 연구와 행정 각각, 그리고 함께 움직일 방안을 도출하는 것이다. 이때에는 보고를 위한 거대한 전략이 아닌 행동과 실행에 초점을 맞추어 매일 어떤 모습으로 일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만일 가능하다면 제도와 시스템의 개선까지 논의하면 좋다.) 그리고 AS IS에서 TO BE에 이르는 로드맵을 구축하고 가장 필요한 혹은 쉬운 방법부터 적용하기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작은 개선의 성취를 느끼고 다음 변화를 이어갈 동력을 얻을 수 있다.

이 단계에서의 소통은 문제 해결적 소통으로 최고 경영자와 센터장, 그룹장, 팀장, 실장 등을 포함한 전체 보직자와의 정기적 대화를 촉진해야 한다. 구성원들과 가까이에서 일하는 중간 리더들의 이야기를 듣고 변화를 향한 힘을 결속시키며 변화의 방법을 조율해야 한다. 또한, 최고 경영자와 구성원이 참여하는 타운홀 미팅을 통해 현안을 바로 듣고 함께 해결 방법을 모색한 후, 빠른 의사결정을 내리는 기회를 제공해 조직 변화를 위한 속도를 높이는 것도 좋다.

정리하면 1단계에서는 조직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공유하고 접점을 발견했다면, 2단계에서는 공동의 지향점을 설정하고 현재와 미래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계획을 수립한 후, 한 발씩 내딛는 것이다. 이때 변화에 저항하는 힘이 변화를 지지하는 힘보다 클 경우, 변화가 시작되기 매우 어려우므로 변화에 대한 공감대 형성과 동참을 촉진하는 것이 중요하며 소수의 큰 목소리에 지나치게 휘둘리지 않는 것도 필요하다.

STEP 3) 진화와 결속

세 번째 단계는 실질적 변화를 경험하며 조직문화를 강화할 때이다. 변화를 계획하고 시도한 단계를 지나 조직이 설정한 TO BE 모습에 한발 가까워져야 한다. 구성원들이 변화를 체감하며 조직의 결속력을 높이는 것이 핵심이다. 이 단계에서 이룰 수 있는 최고의 결실은 조직 성과와의 연결이다.

이를 위해서는 변화의 시도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를 확인하며 변화의 방법과 속도를 세밀하게 점검해야 한다. 그리고 각 분야별로 어떻게 생산성을 높일 것인가를 더 구체적으로 고민한다. 앞서서는 각 영역별로 지향점을 수립했다면, 이 단계에서는 한발 더 나아가 어떻게 조직의 생산성을 높일 것인지, 어떻게 연구 성과를 강화할 것인지, 어떻게 행정의 경영 역량을 극대화할 것인지에 대한 방법을 도출해야 한다.

예를 들어, 연구 성과를 강화하는 일하는 방식으로 1) 국가과학기술을 어떻게 선도하고 어떤 기여할지 머리를 맡대어 우리 연구원의 미래 연구의 주요 키워드를 선정하여 선제적으로 고민하고 2) 연구자들이 좋아하는 연구 분야 혹은 주제를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마련하거나 3) 기술 중심 실행 공동체와 같이 유사한 기술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기술 공동체를 구성하여 집약적으로 해당 분야를 발전시키거나 4) 신규 과제 탐색 그룹과 같이 도전적 과제를 시도할 수 있도록 아이디어를 낸 연구자에게 소수의 인원과 팀을 이뤄 검증할 수 있는 기회와 이후 본래 연구로 돌아갈 수 있는 안정성을 보장하거나 5) 하나의 프로젝트에 반드시 다른 기술을 접목시키는 시도를 해보거나 6) 정기적으로 연구 과제를 소개하고 연구팀이 해결해야 할 기술 이슈를 공개 토론하는 것과 같은 구체적인 방법을 통해 연구 성과로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를 주기적으로 회고하여 무엇이 개선되고, 방법적으로 무엇을 보완해야 하는가를 찾는 동시 조직이 지속적으로 진화할 수 있도록 to be를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


천천히 그러나 완전히

스테판 데닝은 “문화를 바꾸는 일은 수많은 선수가 참가하는 대규모의 장기전” 이라고 말한다. 오랜 시간을 거쳐 조직에서 일어나는 일을 해석하는 렌즈이자 상황에 따라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자리 잡은 조직문화를 바꾼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출연연이 현재보다 좀 더 좋아질 여지가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내가 만난 구성원과 리더들은 설령 각자의 시도가 낙담되었다 할지라도 대부분 연구원을 향한 열의가 있었다. 국가과학기술을 이끄는 기관으로 전체가 부분의 합보다 커야 한다는 생각에 공감대를 형성했다. 변화의 출발은 공감대 형성이다. 개별 전문가가 모인 조직이라 상대적으로 기본 결속력이 약할 수는 있지만 제대로 된 변화가 시작된다면 인간 지성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산출물을 낼 수 있는 조직이다.

그동안의 경험을 반추하면, 프로젝트에서 만난 구성원들은 진짜 변화할 수 있는가를 고민했다. 더 정확히는, 우리가 모여서 논의하는 시간을 통해 변하는 것이 있는가에 대해 묻고 또 물었다. 그러나 변화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난 뒤에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필요한 것은 최고 경영자와 담당자의 의지, 그리고 변화의 방법을 찾는 좌충우돌의 대화이다. 이 마지막 요소가 생각보다 어렵다. 우리는 종종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기 보다 서로와 멀어지는 경험을 한다. 연구원의 논의를 이끄는 역할을 맡은 나조차 때로는 회의가 버거웠다. 그러나 너무 이른 실망을, 너무 빠른 기대를 내려놓고 끈기있게 대화하다보면 공감대가 형성되고 방법이 찾아지며 추진력이 생긴다. 현대 물리학에서 불확정성의 원리를 창시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물리학을 넘어서: 만남과 대화’라는 명저에서 과학은 대화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서로 다른 사람들의 협력이 더 없이 중요한 성과로 귀결된다고 덧붙였다. 이 어디 과학 뿐이겠는가. 앞서 소개한 로드맵이 여전히 어려운 일이라면, 우리 연구원이 내외부적으로 어떤 존재가 되길 바라는지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부터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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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NA
Leading the journey in pursuit of great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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